조선시대 전통놀이. 횃불싸움,석전
일상 정보 2020. 5. 28. 20:17
횃불싸움
횃불싸움은 용감한 소년들이 앞장서서 상대편을 향해 전진한다. 서로 들고 있던 불붙은 홰를 휘저으며 공방(攻防)을 계속하다가 한편이 밀리면 그 동네 청년들이 합류하여 전세를 역전시키고, 그러면 상대 마을의 청년들도 가담하여 본격적인 싸움이 전개된다. 청년들의 횃불싸움은 전쟁을 방불케 한다. 서로 고함을 지르면서 주먹으로 치고 발로 차며, 긴 홰를 인정사정없이 휘두르기 때문에 화상을 입기 예사이며 옷에 불이 붙은 경우도 있다. 홰가 거의 다 타면 상대를 향해 던져 버리고 새로운 홰를 가지고 싸운다. 승부는 부상을 당한 사람이나 횃불을 빼앗겨 항복한 사람이 많거나 후퇴한 편이 진다. 횃불싸움은 석전(石戰)과 병행되기도 하고, 격화되면서 석전으로 발전되기도 한다.
석전
석전은 주로 대보름 무렵에 행해졌지만 지역에 따라서는 단오나 추석에도 벌어졌다. 석전의 전승은 두 가지 수준에서 이루어졌다. 하나는 고을의 읍치邑治를 중심으로 연행되는 ‘고을형’이고 다른 하나는 마을을 배경으로 연행되는 ‘마을형’이다.
먼저 ‘마을형’ 석전의 사례들이다.
• 황해도 안악 석전: 향리에서는 너덜 대 서산으로 (편을 나누어) 매년 정월 15일 석양으로부터 석전이 개시되는데 석전 전후 수일간은 아동들이 타촌으로 왕래치 못한다. 그것은 서로 맹렬하게 적시하는 까닭이다. 전투는 소아小兒로부터 시작되어 아이들이 패하면 대아大兒들이 이에 대신 출진하고 대아들이 패하면 대인大人들이 출진하여 결전을 행하는 것인데 투석은 손에 쥐어 던지는 것이 아니라 소위 ‘망팔매’ 또는 ‘줄팔매’라는 것으로 노끈 끝에 소석小石을 결박하여 그것을 서서히 돌리다가 갑자기 전 완력을 다하여 이것을 투척하면 돌만이 빠져나가는 것이다. 접전시의 고함 소리는 ‘다과라’라고 하며 패주자를 따라 그 마을에 침입하여 가옥을 파괴하는 일도 있고, 혹 적촌에 변장 기습하기도 하며 밤이 어두워서 석전이 불가능하면 횃불(좃대로 만든)로서 상전하기도 한다.
- 손진태, 석전고石戰考
• 경상북도 문경 산양면 현리와 산북면 서중리의 석전: 석전은 금천을 사이에 두고 마주한 현리와 서중리 사이에 벌어졌으며 1920년대 초까지 전승되었다. 추석차례를 마치면 양편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줄팡게(줄팔매)’를 들고 금천錦川가로 모였다. 줄팡게는 일종의 간이 투석 도구로서 질긴 삼베로 만들며 길이는 한 발 정도였다. 싸움은 열 살 남짓한 아이들부터 시작했지만 차츰 연령이 높아져서 마침내 서른 살 미만의 청년들이 싸움을 주도하였다. 이때쯤이면 마을의 노인과 부녀자들이 각 편의 냇가에서 싸움을 구경하며, 격려의 함성을 지르고 어른들은 더러 작전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 싸움이 시작되면 양편은 강 양편에서 상대편을 향해 돌을 던졌다. 이때 줄팡게를 이용하면 돌을 멀리 날려 보낼 수 있어서 효과적이었다. 차츰 싸움이 격렬해지고 한쪽이 밀리면 다른 한쪽은 강을 건너 상대편을 추격했다. 추격하다가 서로 마주치면 육박전이 벌어지기도 했는데, 깨진 기왓장으로 머리를 내려칠 정도로 격렬했다.
‘마을형’ 석전의 형태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아이들만으로 이루어지는 자연발생적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아이에서 어른으로 놀이 집단이 확산되는 계획적인 것이다. 앞의 경우는 아이들의 쥐불놀이나 횃불싸움에 이어서 벌어지는 이차적 싸움인 데 비해 뒤의 경우는 계획적이고 독립적이며 관행화한 싸움이다. 두 경우를 구별해주는 요소 가운데 하나가 줄팔매이다. 놀이꾼들이 투석 도구인 줄팔매를 지참하고 있다는 것은 그 석전이 계획적이고 관행적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말해준다.
다음으로 ‘고을형’ 석전의 사례이다.
• 안동부의 석전: 매년 정월 열엿새 날, 사람들이 부의 가운데를 흐르는 시내를 경계로 좌우로 나뉘어서 돌을 서로 던져 승부를 결정해 한 해의 풍년을 점친다. 경오년에 적을 토벌할 때에 모집하여 선봉을 삼았더니 적이 감히 나아오지 못하였다.
- 영가지, 풍속
• 김해부의 석전: 석전을 좋아하여 매년 사월초파일부터 아동들이 모여 성남城南에서 석전을 익혔다. 단오에 이르면 장정들이 모여 좌우로 편을 나누고 깃발을 꽂고 북을 치며 고함을 지르고 날뛰면서 돌을 던지는 것이 비가 퍼붓는 것 같았다. 승부를 겨루었을 따름이니 비록 죽거나 다쳐도 후회하지 않았다. 수령이 금할 수 없었으며 경오년 왜적을 정벌할 때 돌을 잘 던지는 자를 선봉으로 삼으니 적병이 나아오지 못하였다.
- 신증동국여지승람 권32, 김해 풍속
‘고을형’ 석전은 ‘마을형’과 마찬가지로 거주 지역에 따라 편을 구성하였고 승부의 결과로 한 해의 길흉을 점쳤으며, 시간이 흐름에 따라서 아이에서 어른으로 참여 연령이 높아졌다. 한편 조선 전기 이후 관에서는 그 위험성 때문에 석전을 금지했지만, 김해부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석전에 대한 관의 금압은 그다지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는 그만큼 석전이 민간의 세시 행사로서 강인한 전승력을 갖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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